[천자칼럼] 시계

입력 2016-03-29 17:47   수정 2016-03-30 05:38

권영설 논설위원 yskwon@hankyung.com


기계식 시계가 등장한 것은 13세기 후반 유럽에서였다. 도시마다 대성당이나 광장에 기계식 시계를 설치하는 경쟁이 붙었다. 15세기 들어 독일에서 회중(懷中)시계가 발명되면서 개인도 시계를 갖게 됐다. 태엽기술이 적용됐는데, 더 정확한 시계를 만들기 위해 제작 기술이 발달하는 계기가 됐다. 시계는 근대정신의 상징이다. 사람들은 해가 지고 달이 뜨는 우주의 섭리를 시계를 통해 확인하고 그 원리를 인간이 계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1656년 추시계가 등장하면서 시계의 정확성은 더욱 발전했다. 진자의 왕복이 동일한 시간에 이뤄진다는 원리를 바탕으로 개발된 추시계는 그러나 흔들리는 배 위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해양 개척에 나선 영국은 1714년 엄청난 상금을 내걸고 해상시계를 공모했다. 1735년 당시 42세의 목수이자 시계공이던 존 해리슨이 캐비닛 크기만 한 해상시계 H1을 만들어냈다. 3년간 검증한 결과 하루 오차는 5초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은 ‘배우지도 못한 목수의 우연한 발명’이라며 상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해리슨은 포기하지 않고 개발을 거듭해 66세가 되던 해 무게 1.4㎏, 지름 13㎝짜리 해상시계 H4를 완성했다. 상금은 그가 죽기 3년 전에야 받았다고 한다. 대영제국의 해양개척 역사는 시계와 함께 꽃피운 셈이다.

현대적 손목시계를 상업화한 것은 ‘왕실의 보석상’ 루이 프랑수아 카르티에였다. 친구인 브라질 비행사 산토스 뒤몽이 “조종하면서 회중시계를 꺼내보는 게 불편하다”고 하는 말을 놓치지 않았다. 모서리를 살짝 둥글게 처리한 사각형 모양의 손목시계를 그를 위해 만들었고 1911년 일반 판매를 시작했다. 지금도 ‘까르띠에’ 브랜드 라인에 있는 ‘산토스’가 그것이다.

손목시계 하면 스위스를 빼놓을 수 없는데 거기엔 종교개혁가 칼뱅의 공이 크다. 칼뱅은 1541년 제네바 시장으로 당선되자 청빈한 생활을 강조하며 귀금속류 착용을 금지했다. 대신 금속세공업자들에겐 실용적인 회중시계를 생산하도록 했다. 장인들이 스위스로 몰려들며 스위스 시계의 명성을 쌓아갔다.

일본과 함께 세계 중저가 시계 시장을 주도하던 한국의 시계산업이 10년 새 판매액이 반의반 토막으로 떨어지는 등 추락하고 있다고 한다. 휴대폰 보급이 결정적인 영향을 줬을 것이다. 1980년대만 해도 TV뉴스에서 9시 정각을 알리던 시보 광고를 시계업체들이 했는데 그것도 추억이 될 모양이다.

권영설 논설위원 yskw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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